(사진=KBS2 방송화면)
한국에서 10년째 살고 있는 외국인 친구가 어느 날 이런 말을 했다. 한국어는 존대어가 있어서 어려운데 솔직히 자신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순히 나이가 많아서, 직위가 달라서 존대어를 쓰지만 그것이 오히려 서로가 자유롭게 말을 하는 상황을 막는 데다 나이를 위시하는 경향이 너무 강해서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데도 말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 그가 겪은 한국의 존대 장벽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우리가 쓰는 존대어가 과연 예의바르고 상식적인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됐다. 그리고는 일상에서 발견한 존대어의 함정을 불현듯 깨닫게 됐다.
가장 단적인 예가 이런 경우다. 얼마 전이었다. 버스를 타고 출근하던 길이었는데 버스 운전사와 급격한 끼어들기를 시도한 옆 차량이 시비가 붙었다. 더욱이 서 있던 승객이 요금통에 허리를 부딪치고 통증을 호소하는 상황이라 버스 운전사는 날이 서 있었다. 그런데 세단에서 내린 나이가 지긋한 중년 남성은 “차 안에 서 있던 승객들이 다칠 뻔했다”는 버스 운전사의 항의에 “버스가 바로 뒤에 있는지를 몰랐다”고 버텼고 급기야 고성이 오가는 상황이 벌어졌다. 나로선 출근 시간이 늦어지는 상황에 짜증이 밀려올 뿐이었는데 그때 중년의 세단 운전자가 이런 말을 했다. “너 몇 살이야?” 버스 운전사가 말을 짧게 했다며 삿대질과 함께 자꾸 나이를 들먹였다. 40대나 됐을까 싶었던 버스 운전사는 “지금 나이가 중요하냐. 사과할 건 제대로 사과하고 다친 승객에게도 전화번호를 주라”고 항변했지만 세단 운전자는 계속 나이로 밀어붙이며 “몇살이나 먹었다고 반말이냐”는 말을 되풀이했다. 결국 승객들 일부가 버스 운전사 편을 들고 상대를 말린 후 종료된 싸움이었는데 끼어들기를 해서 누군가 다친 상황에서 ‘나이’ 운운하는 상황이 탐탁지는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논쟁적, 객관적 부분을 모두 배제한 채 존중받고 싶은 이들의 일화가 오늘도 온라인을 뜨겁게 달군다. 그 뿐인가, 가끔은 나이만 빼면 절대로 존대어를 쓰고 싶지 않은 이들도 많다. 어쩌면 존대어는 존중과 예의의 표시가 아니라 오직 나이만 걸고 넘어지게 만드는 사회의 장벽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사진=소명출판)
■ 당연하게 사용해왔던 존대어와 반말, 그 안에 숨겨진 건
만약 국내의 존대법 때문에 부당하다 생각되는 일을 겪었거나 존대법 자체가 불합리하다고 한번쯤이라도 생각해본 적 있다면 영어학자인 김미경 교수의 ‘영어학자의 눈에 비친 두 얼굴의 한국어 존대법’을 읽어볼 만하다. 사실 요즘 말로 ‘꼰대’라 불리는 분들이 읽으면 더 좋을 만한 책이지만 아마 그분들은 책을 집어던질지도 모른다.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며 국제사회를 경험한 저자가 조선시대식 존대 문화라며 과감하게 현실을 꼬집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논리는 이렇다. 국내 존대법은 단지 문법의 문제가 아닌 인권의 문제라는 것. 그래서 저자는 이 존대법에 숨은 우선권이라는 논리와 하대 상대에 대한 인권 유린을 공개적 재판대에 올려놓으면서 존대법이 품고 있는 본질적 문제들을 꼬집는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한국인이 만나면 나이부터 묻는 이유, 이름이 아닌 직위로 부르는 의도 모두 계급적 존대법 때문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성경까지 끌어온다. 만인 평등이라는 인권적 제 1 가치를 심어준 예수의 성경은 한국에 오기 전까지 누구에게도 존대를 하거나 반말을 한 적이 없다. 오직 국내의 성경에서만 사람들에게 하대를 하는 예수를 볼 수 있다. 저자는 이같은 점을 꼬집으며 우리가 당연하듯 사용해온 존대법이야말로 비민주적이고 계급차별적이라고 주장한다. 더군다나 이같은 한국어 존대법은 나라 구석구석, 시도 때도 없이 나이, 그리고 계급에 대한 우선권을 강요하고 나선다. 그 사례 중 하나가 중국에 간 여섯 살짜리 한국 남자아이가 네 살짜리 중국 아이에게 갑자기 주먹을 휘두른 이유다. 다름아닌 반말 때문이었다. 고작 여섯 살 아이가 존대법의 법칙을 ‘위아래를 정하는 것’ 즉, 서열로 배운 것이다. 또한 존대어 반대에는 반말도 존대한다. 존대어에 따라 반말도 발전을 거듭해왔는데 이것이 사회의 서열과 계급의 격차를 더 벌인다. 존댓말로 연장자와 고위 직책자를 모시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반말로 아랫사람을 짓밟는 사회, 모두가 평범한 대화법이 이뤄지지 못하는 이유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 계급차별적·인권유린적 존대법, 개인과 국가 경쟁력 막는 길?
무엇보다 저자는 이같은 존대법이 국가 경쟁력을 저해하는 역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우려한다. 이 지점이 무척 흥미롭고 공감되는 대목이다. 학생과 교사, 직장 후배와 팀장이 서로 이름을 부르며 자유롭게 토론하는 어법의 해외와 달리 한국은 평등한 언어의 소통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반세기에 걸쳐 한국의 학생들은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잘 따르는 성실함을 겸비해야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성적은 세계적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국제 무대에 섰을 때 경쟁력은 최하위다. 토론장의 발언권에서부터 노래방에서의 노래 부르기 순서까지 깍듯한 존대법이 창의적 사고와 발언을 가로막는 일들이 일생에 걸쳐 계속되면서 수많은 이들이 예절이라는 철장 안에서 실패에 대한 두려움만 키운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우리는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언어를 사용한다는 자부심과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수식어를 계승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안에 갇혀 보다 평등하고 공정하며 더 많은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는 사회를 잃어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천민까지 배울 수 있는 가장 민주적인 문자로 탄생한 한글을 사용하면서 여전히 비민주적이고 계급차별적인 어법을 사용한다는 저자의 표현은 가슴 아프게 와닿는다.
저자는 존대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대안으로 윗사람, 아랫사람이 모두 상호존대를 하는 방안, ‘께’나 ‘께서’ ‘하시는’ 등 규칙이 없는 평등어로서의 짧은 말 사용으로 가볼 것을 제시한다. 이 부분은 당장 뜯어고치긴 어려운 일이고 현실적으로도 많은 고민과 사람들의 동의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설사 이 대안을 오랜 관행을 깰 수 없는 비현실적이라 치부한다고 해도 한국의 존대법에 대한 불합리하고 비합리적인 일면과 오랜시간 묵혀 온 폐해에 대해서는 깊고 진지하게 생각해볼 만한 일이다.